성규 형, 나 어제 이성열 만났다가 재미있는 이야기 했다. 들어 볼래? 



그... 일단 형 만나기 아주 전 일이야. 진짜 아주 예전에 이성열이 술 먹다가 나한테 그랬거든. 

-야, 남우현. 내가 친구니까 팩트 하나 짚고 가 준다. 넌 성격이 존나 지랄맞아서 평생 연애의 이응도 제대로 못하고 죽을 새끼야. 다혈질에, 개차반에,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놈이니까.... 내가 널 보고 성악설을 믿어요, 알간? 가지가지로 파탄자인 너랑 친구인 나에게 좀 감사해야겠단 생각 안 드냐? 양심까지 없고. 하여튼, 너 좋다고 따라다닐 새끼는 눈이, 응, 눈이... 정상은 아닐 거야. 

이성열이 그때의 손 휘휘 젓는 모양까지 똑 따라 하더니 갑자기 형 이야길 꺼내더라고. 하긴 성규 형이 눈이 좀 작긴 하지. 지금 생각해 보니까 웃기다. 우현아, 나 돗자리 깔까? 하고. 아, 형. 나 진지하니까 웃지 마. 형 눈 작다고 그래서 내가 그 새끼 좀 때려 줬어. 잘했지? 키만 큰 게 아가리는 존나 잘 털어요.

아무튼, 한참 웃다가 걔가 그러더라. 성규 형 안 본 지 오래라고, 잘 지내냐고. 그래서 갑자기 생각이 났어. 누군가 날 보고 형의 안부를 묻는다면, 그건 형이랑 내가 하나라는 뜻일까?



나 생각 많은 편이잖아, 그지. 형이 그만하래도 하나 물고 늘어지면 땅굴까지 파고 들어가는 거 전문이잖아. 그래서 계속 생각해 봤어. 우리가 서로한테 궁금한 게 더 없을 정도로 잘 알면... 그건 비극일까, 아님 행복일까?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여기까지 왔어. 나는 형을 왜 사랑할까? 내가 형을 사랑하는 이유는 뭘까, 그런 거. 물론 누가 내게 형을 사랑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대답하는 게 쉽지는 않아. 내 손가락으로는 다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데 뭐 어떡하냐? 아, 뭐야. 형 손 저리 치워라. 이건 형이랑 내 손가락 다 더해도 안 되거든.


형 때문에... 또 얘기가 딴 데로 샜잖아. 성규 형, 나 진짜 진지하거든? 이거 날이면 날마다 오는 그런 진지함이 아니야. 나 요즘 감 찾느라 바쁜 거 알 만한 사람이 꼭 그래. 암튼, 내가 형을 사랑하는 이유를 딱 정리해 봤어. 빼먹은 게 좀 많을 수도 있는데, 일단은 들어 봐. 



비 오는 날엔 형이랑 우산 하나를 나눠 쓰는 게 좋아. 내가 우중충한 날 싫어하는 거 잘 아는 형은 거의 매번 데리러 오잖아. 괜히 울적해지는 마음이 싫어. 형이 옆에 있어야 돼. 우산 아래서 단단히 내 허리를 감아 오는 그 팔, 형의 마음을 건네는 것마냥 내 쪽으로 기운 우산.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어느새 젖어 버린 형의 어깨를 좋아해.


주말 아침엔 같이 마음 놓고 늘어지게 자는 게 좋아. 내가 한참을 자고 깨도 잠 많은 우리 형은 내내 세상 모르고 자더라. 형은 부시시한 모습도 왜 그렇게 잘생긴 건데? 그래서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거야. 살랑이는 바람에 흩날리는 형의 갈색 머리칼을 좋아하는 건, 진짜 어쩔 수 없어.



형이랑 보는 영화는 늘 재미있어. 베스트는 심야 영화? 달콤한 사랑 영화를 볼 땐 꼭 형이랑 내 얘기 같아서 좋고, 슬픈 영화를 볼 땐 나보다 먼저 챙긴 휴지로 떨어지는 내 눈물을 닦아 주는 게 좋고, 무서운 영화를 볼 때에는 다가와 꼭 잡아 주는 그 손이 좋아. 그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영화관이 밝아질 때야. 항상 나를 돌아보며,


-우현아, 재미있었어?

하고 웃는 형이, 진짜 좋아.


아, 또 있다. 형이 야근 때문에 늦게 들어온 날.

[좀 늦겠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고 있어, 찐빵아.]

형도 알지? 나 형 말 더럽게 안 듣는 거. 그때 나 거실 소파에서 내내 기다렸잖아. 형 오는 거 보겠다고. 그러다 까무룩 잠들었는데 어느새 온 형이,

-찐빵아,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가. 못생겨져.

하고 나 깨웠던 거. 비몽사몽인 정신으로도 형의 눈에 담긴 애정을 읽을 수 있더라고. 난 형이랑 다르게 눈이 커서 그런가.... 졸려서 눈 한번 깜빡 했는데 침대였어. 그 흐린 시야로도 내가 뭘 봤고 뭘 기억하는지 알아? 옷도 아직 못 갈아입고, 내 손발 차갑다고 한참을 문지르고 있던 형.

-그러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래도. 우리 만두 다 식었잖아. 감기 걸릴라.

잠든 내 앞에서 조곤조곤, 쏟아지는 애정에 허우적거리면서 그날은 아마 형 꿈을 꿨어. 초록색, 찰랑이는 파도, 품이 넉넉한 옷, 쌉쌀한 낙엽 냄새와 이른 아침의 이슬, 초콜릿이 뚝뚝 떨어지는 케이크, 그리고 나를 보고 웃는 형.


이렇게 늘 투정만 부리는 나여도 형한테 마냥 어리게 보이는 건 싫거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형에 비하면 난 진짜 어린가 봐. 지금도 가끔 후회하는 순간이 있어. 툭하면 이별을 찾았던... 참 어렸던 그때 말이야. 

그때의 나는 형이 날 사랑하는 걸 알면서도 불안했었어. 너무 좋아하니까, 놓치기 싫어서.... 그렇게 흔들리는 내 애정이 엇나갈 때면 우리 크게 한 번씩 싸웠었잖아. 아니, 형이 받아친 적은 없으니 싸웠다고는 못하나? 재수 없긴 해도 이성열 말이 맞아. 난 진짜 다혈질에 개차반이야. 내 성질을 내가 못 이겨 깨고, 던지고, 부수고.... 형은 늘 화 한번 안 내고 그러는 날 가만히 지켜만 봤었잖아. 소동이 다 끝나고 나서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목소리로 날 부르던 형을 기억해.

-우현아.

-…….

-남우현.

-... .

-이제 이리 와.

상처란 상처는 내가 다 그어 놓고 그런 형 목소리 들으면 꼭 눈물이 나더라.



나 진짜 바보지. 불안할 게 없는 걸 알면서도 말도 안 되는 행복에 괜히 불안을 키웠던 때가 있어. 아, 그렇다고 형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며 의심한 적은 한 번도, 진짜 한 번도 없었어. 오히려 늘 그 반대였으니까. 그냥 형에 비하면 너무 부족한 내가 미안하고, 바보 같고, 속상하고....

-울지 마, 왜 울어. 울고 싶은 건 나야. 봐,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예쁘면 다인 줄 알고, 이게.

투박한 손길로 내 얼굴에 죽죽 자리잡은 눈물길 지우는 형이 너무 다정해서 엉엉 울었었어. 언젠가는 나를 죽일 것만 같은 형의 다정을 너무 좋아해.



성규 형, 형의 존재는 늘 나한테 말도 안 되는 것 같아. 이 지구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같은 하늘, 같은 땅 위에서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시간대를 살고, 서로의 일상에 스며들어 사랑까지 한다는 거, 진짜 말이 안 되지 않아? 알겠더라고. 형은 하늘이 나한테 준 상이 분명해. 전생에 나라를 구해서 착하다고, 참 기특했다고. 그래서 이번 생에 준 상이 형일 거야.



하지만 한번 뒤집어 생각해 봐도 똑같아. 형은 나한테 벌일지도 몰라, 그것도 아주 잔인한 벌. 내 하루의 시작과 끝이 모두 형이야. 나를 이루는 게 전부 형이야. 형 없는 나는 상상도 안 돼. 안 해 봤어, 안 할래. 나 정말 형 없이는 못 살겠는데, 이게 벌이 아니면 대체 뭐야?


-나랑 살래, 나랑 죽을래.

형이 꽂혀서 몇날 며칠을 내내 보던 드라마, 기억해? 흔해 빠진 대사 한 마디 툭 뱉으며 씩 웃는 형을 보면서, 알겠더라고. 형은 나한테 하늘이 준 벌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형이랑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오겠어? 나처럼 열심히 사는 애가 또 어디 있다고. 전생을 얼마나 개좆같이 살았으면 이렇게 잔인한 벌을 주나 싶어. 형... 인상 찌푸리지 말고. 알겠다고, 말 예쁘게 한다니까.



있잖아, 성규 형. 나 형을 진짜 좋아해.

출근하기 전이면 아무리 바빠도 다가와 입 맞추고 가는 형을, 데이트 코스는 내 기준을 우선으로 두고 짜는 형을, 맛있는 음식은 꼭 내 그릇 위에 먼저 올려 놓는 형을, 내가 감기라도 걸렸다치면 약국에서 온갖 약이며 죽이며 다 사 오는 형을, 볼살 톡톡 건드리며 난 살 좀 붙은 게 귀엽다고 말하는 형을, 불면증에 설치는 밤이면 잠들기 전까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형을, 퇴근하고 오면 나한테 제일 먼저 안기며 충전 중이라고 말하는 형을, 기념일엔 항상 라넌큘러스 한 다발을 선물해 주는 형을, 멀미가 심한 나라서 부드럽게 운전하려 노력하는 형을, 모든 일의 우선순위에 항상 나를 두는 형을, 가빠지는 호흡을 같이 맞춰가며 키스하는 형을, 몸을 섞을 때면 늘 구석구석 자국을 남기며 예쁘다고 해 주는 형을, 내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는 형을,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시들지 않는 애정으로 나를 바라봐 주는 형을, 그런 형을,

좋아해.



그러니까... 결론은 아무리 나열해도 안 된다는 거야. 내가 형을 사랑하는 이유는 삼일 밤낮을 외워도 모자라. 형, 솔직히 말해서 다 알고 있었지? 내가 형한테 이렇게 빠져서 허우적대는 거, 모르는 거 아니었지? 전부 알면서 그냥 웃고만 있던 거지. 그게 아니라면,

-우현아, 넌 어차피 나 없으면 안 되잖아.

하고 새벽빛 받아 빛나는 얼굴로, 자신 넘치는 그 얼굴로 웃던 형의 모습이 그렇게 선명할 수가 없단 말이야. 진짜... 멋있어서 더 재수 없어. 형도 나 없인 안 되면서. 내가 없는 건 형도 상상할 수 없으면서.



형이 그랬지. 변하지 않는 건 없다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거라고. 그러니 사랑에도 기한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형, 사랑에도 기한은 있지? 근데 나는 그게 우리에겐 조금 더 먼 얘기였으면 해. 형이랑 하고 싶은 게 아직 많아. 사소한 것부터 엄청난 것까지 한가득이야. 들려 주고 싶은 노래가 많고, 나누고 싶은 얘기가 많아. 같이 가고 싶은 곳이 많고, 같이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아. 안기고 싶고, 부비고 싶은 밤들이 아직 너무도 많아. 나의 어제는 이렇게 또 사라지겠지만, 형의 오늘은 내 곁에 남아 있었으면 해. 늘 그랬듯이 나와 함께였으면 해. 그렇게 매일이, 우리가 함께 그릴 내일의 연속이었으면 해.




좀 부끄럽긴 한데, 이게 내 진심이야. 성규 형, 나 진짜 형을 많이 좋... 아, 잠깐, 잠깐만. 형, 미쳤, 아, 쫌! 잠시만... 나 아직 말 다 안 했다고, 야, 김성규. 아, 씨.... 입술에 다시 해. 뭐, 왜. 먼저 입술 부벼 놓고 어디서 빼. 빼냐? 형 지금 튀었냐? 잡히면 뒤졌다, 진심. 김성규, 이리 안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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