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너무도 맑아 도무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네 머릿결 같은 수초와 살결에 숨 쉬는 산호초
그리고 무지개처럼 산란하는 물보라의 빛깔들이
마치 나를 초대하듯, 
내게 수문을 열듯 너울대지

좋아, 네게 기꺼이 빠져보도록 하지.
달갑게 투신해볼게.
깊이조차 알 수 없는 네에게

나, 영영토록 가라앉아보도록 하지.




-아, 진짜 존나 더워.


누구 것인지 모를 한 조각의 짜증이 교실 가운데로 터져나왔다. 천장에 달린 선풍기는 털털거리는 소음만을 내며 더운 바람을 돌리고 있었다. 11시, 작열하는 태양이 내리쬐는 햇볕이 언제였냐는 듯, 밑이 깨진 어항처럼 비를 쏟아내며 멋대로 제 입맛을 바꾸는 무더운 여름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세상이 울린다. 작은 소음도 두 배로 커지는, 세상의 울림. 적어도 성규는 그렇게 생각했다. 뱃속이 간지러웠다. 끝을 모르는 빗소리 때문인지 교실에는 적막이라는 장막이 드리운다. 비 오는 날은 이거 하나 마음에 든다. 어느새 자라 눈 앞을 가리는 앞머리를 한번 쓸어올린다. 유달리 희고 긴 손가락이 유연히 움직인다. 등허리에 붙은 교복 셔츠를 펄럭거린다. 정말 끈적하고, 더우면서도, 축축한.... 이런 불쾌함은 성규 역시 늘어지게 만들었다. 툭, 투둑,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손짓에 성규의 시선이 응답한다. 진짜 어마어마하게 내리네. 젖는 건 싫은데. 여러모로 참 귀찮겠다고 생각하며 성규는 책상 위로 고개를 묻었다. 돌아간 목 언저리께가 뻐근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게 방학에는 좀 안 부르면 좋아.


이 지역에서는 그나마 괜찮은 학교로 손꼽히는 고등학교는, 그깟 자잘한 명성을 지키기 위해 특별 보충이란 명목하에 쉼 없이 움직인다. 그래, 학생들 갈아넣어 쟁취하는 것들이 사회에 좀 많아. 성규는 깊게 호흡하며 투덜거렸다. 구석구석 맞물려 하나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톱니바퀴. 그중 자신은 몇 번째의 부속품일까. 지루하다. 그게 뭐가 됐건, 정말 지루하다고 성규는 생각했다.


아직은 그랬다. 뒤를 돌아 본 빈 자리 하나가 눈에 밟힌다.



책장 넘기는 소리와 사각거리는 펜촉의 움직임으로 가득한 공간.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추적추적, 멈추지 않는 빗소리. 잠이 오려는 것도 같고. 고개를 반대로 돌려 시계를 보니 1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시 모로 고개를 묻고 눈을 감는다. 여전히 자리는 비어 있다. 시계 초침 움직이는 소리가 몸속 깊은 곳의 울림과 맞아들어갈 때,


적막하던 교실의 뒷문이 열린 것은 아마 그때였다.

내내 성규 주변을 감싸고 돌던 지루함도 깨졌다.



잔뜩 젖은 머리보다도 나를 더 젖게 만드는 남우현.




7월, 그 여름




일순간 모든 눈들이 교실 뒤로 쏠렸다. 어두운 방 안을 더듬다 발견한 스위치를 누르듯, 남우현에 얼굴에 멋쩍은 웃음이 팍, 하고 켜졌다. 하하, 유한 눈매의 중심인 눈꼬리를 더 내리며 웃어보인다. 오동통한 아랫입술에 가린 덧니가....


귀엽다.


...귀엽다?



아... 또 시작이다. 이건 정말....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남우현을 떠올리고 있는 내가, 또 시작이다.



물론, 남우현과 나는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없었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나 거리낌없이 다가갈 수 있는 상대가 남우현이라면, 나는 스스럼없이 친해지기엔 인상부터가 달랐다. 상대와의 대화에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게 남우현이라면, 나는 늘상 필요한 말만 했다. 남우현은 일반적인 고등학생으로 일반적인 공부를 했고, 나는 예체능을 했다. 자연스레 어울리는 친구들도 달랐고, 마주칠 일도, 계기랄 것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남우현을 아는 것은, 그 해사한 웃음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긴 했었기 때문에.



아무튼 일면식도 없는 내가,

왜,

남우현을,

하고 묻는다면.



답은 간단했다.

나는 우리의 차이가 마음에 들었다.

아니, 공통점일지도.



맥락은 늘 존재한다. 내 일상을 뒤엎은 맥락은, 흔해 빠진 방과 후의 어느 날이었다. 도서관에서 바흐 관련 서적을 뒤적거리다 하나를 집어들었다. 삶과 음악의 종교적 뿌리, 식상하기가 정도가 없네, 하고 생각했었다. 묵직한 것을 쥐고 책들로 가득한 책장을 나서려는데, 복도 끝에서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순간, 손에

쥔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남우현?



책장들이 꼭 고목처럼 솟아 있고, 오래된 책들에서는 숲보다 진한 나무 냄새가 났다. 그 끝에 남우현이 있었다.




남우현은 손을 들어 책 표지와 책장을 확인하고, 제자리로 보이는 곳에 꽂아 두었다. 그러고 나서 종이에 무언갈 체크하더니, 이내 다른 책을 들어 똑같은 행동을 했다. 자꾸 내려오는 오른쪽 교복 소매가 신경 쓰였는지 입술을 깨문다. 곧 단추를 풀고 소매를 말아올린다. 이따금씩 마주칠 때면 보이던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그 웃음은 온데간데 없고, 남우현을 안 이래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저 축 처진 눈꼬리가, 저런 표정도 할 수 있구나. 남우현이 저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나. 나는 도서관 한가운데 못이라도 박힌 듯,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일련의 과정들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피아노를 치는 나는, 항상 예술이라는 가면을 쓴 소음 속에 산다. 그렇다고 해서 피아노가 질린다거나, 음악이 지겹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종종 고막을 찢을 듯한 이명이 사라지지 않을 때면, 모든 소음에 지쳐 그냥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내게 그날의 남우현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뭐라 형언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남아 있다. 남우현의 곁에는 늘 반짝거리고, 휘황찬란하고, 시끄러운 것들만 있을 줄 알았다. 완벽히, 내 착각이었다. 그는 적막과 더 어울렸다. 



일상이라는 소음(騷音) 속 나와, 남우현.

악음(樂音)을 찾아 헤매는 남우현과, 나.



책으로 쌓아올려진 숲 속의 남우현.

정경 속의 남우현.

내가 찾던,

고요.



이것이 내가 그를 눈에 담게 된 맥락이다.



드르륵, 잠잠하던 책상이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남우현이 자리에 앉는다. 빈 자리가 채워졌다. 어느새 온 신경이 뒤로 쏠려, 남우현을 의식하고 있다. 아, 그러니까 왜 자리는 하필. 이건 뭐, 쳐다볼 수도 없다. 지루하다고 생각한 적이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자세를 바로잡는다. 내가 이렇게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이었나. 쩝, 입맛을 다시다 열심히 잔머리를 굴렸다. 반짝,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책상에 멀쩡히 자리한 지우개를 괜히 떨어뜨려 본다. 아, 김성규 존나 똑똑해. 자연스레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려 본다. 떨어진 지우개를 줍는 시늉을 하며 뒤로 눈을 돌린다.




눈이 마주친 건 순간이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은 남우현이, 눈을 휘어 웃는다.

딸꾹, 나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귀까지 붉게 달아오른 건, 당장 거울을 보지 않아도 훤하다.

눈을 재빨리 돌리자 푸흡, 하는 소리가 퍼진다.



아, 씨발. 좆됐다.





+)


-성규야, 네 피아노 듣고 싶은데, 쳐 줄래?


하는 우현이가 보고 싶었는데 너무 길게... 썼는데....

log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