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딩 때부터 공부 하난 기깔나게 잘했던 성규가 있다

공부에 크게 흥미가 동하는 건 아닌데 그냥 잘하니까, 잘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이것 말고 크게 관심을 끄는 것도 딱히 없으니까, 그래서 공부만 팠음


흔히들 말하는 하늘에 있는 좋은 대학을 가고, 무난하게 경영학과를 다님 그러다 우연히 첫눈에 반했다, 하고 부를 만한 여자가 법대를 다니길래 뭣모르고 무작정 복전을 하고 흘러 흘러 고시 준비도 함


남들은 줄줄이 낙방하는데 운 좋게도 1차에 덜컥 붙은 성규임 사람이 고시에 붙을 수 있는 가장 빠른 타이밍이랬던가 지나가는 친구의 말을 듣고도 그랬구나 고개만 끄덕거림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야 운이 좋다지 나름 치열하게 공부했던 성규임


2차도 붙고 연수도 받고 변호사로 바쁘게 살아도 보고 기업도 들어가 봄 세월은 또 흐르고 흘러 대학 동창들 모임에서 아는 선배의 조언을 듣게 됨 요즘은 학원 강사 쪽도 괜찮다더라 음 그래? 그쪽도 나쁠 건 없지


대한민국, 그 좁은 땅덩어리의 더 좁고 좁은 노량진은 하루가 바쁘게 흘러감 24시간도 36시간처럼 쓰는, 써야 하는 사람들이 천지니까


여기저기 빽빽히 들어찬 공시생들 사이에서 성규는 학원 앞 벽에 붙은 전단지를 한참을 보고 잇음

두 달 만에 100점, 기적의 신화. 행정법은 김성규!

어느새 여기까지 왔나 싶다가도 스스로가 기특하기도 함


줄줄이 솟은 학원가들, 너나 할 것 없이 스타 강사를 내세워 수강생을 긁어모으는 경쟁 속, 그 속에서 당당히 행정법 1타 강사로 자리잡고 있으니


내내 우두커니 서서 홍보물을 보고 있던 성규는 아차 이러다 늦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생각을 하며 바삐 걸음을 옮김




성규는 아닌 게 아니라 과연, 제 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음 처음 공무원 시장에 뛰어들 때부터 컴팩트하고 흡수력 있는 강의, 기출로 끄집어내는 발현력, 가히 놀라울 만한 적중률, 무엇보다도... 수려한 외모! 로 주목이란 주목은 다 받았으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합격률을 보이니 합격생들의 후기로 하나 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함 물 밀 듯 금세 수강생은 몰려들고 전 타임 마감이라는 새로운 기록도 세워 봄


물론 악필이라는 점이 그의 미세한 마이너스적 요소였지만




-처벌법규나 조세법규와 같이 국민의 기본권을 직접적으로 제한하거나, 침해할 소지가 있는 영역에서는 구체성의 요구가 어떻게 된다고 했죠?


-네, 맞습니다. 좀 더 강화됩니다. 그래서 그 위임의 요건과 범위가 일반적 급부행정의 영역에서보다 더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한다고 제가 말씀을... 아, 여러분, 힘드신가요?


힐끗 시계를 확인한 성규가 약간은 멋쩍어 보이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임 세 시간 내리 이어진 강의-그마저도 중간 중간의 쉬는 시간은 매우 짧았던-에 수험생들은 이미 반 죽어난 표정을 짓고 잇었고 성규는 속으로 진도를 계산함 뭐 이 정도라면 보강 한두 개 잡으면 금방 끝내겠네


-많이들 지치신 표정이시네요. 꼭 좀비 같아요.


분위기를 풀려 부드럽게 던진 농담에 저쪽 끝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하나 둘 퍼졌음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여러분, 오늘도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짝짝짝, 끝을 알리는 수험생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책상 끄는 소리, 죽겠다고 투덜거리는 소리, 짐 싸는 소리로 강의실은 시끄러워짐 휴 나도 죽겠다 나도 속으로만 삼키며 물로 목을 대충 축이는 성규 앞으로 누군가 다가옴


-성규 쌤, 이거....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얼굴로 웬 남학생 하나가 뭘 건넴 성규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뜸 저게 뭐지 홍삼?


-이게, 목에 그렇게 좋대요. 울 성규 쌤 말씀 많이 하시니까 좀 챙기셨음 해서요.


똥그란 안경 뒤에 가려진 더 똥그란 눈동자가 눈을 휘어 웃음 흠... 뭘까 뭔가 익숙한 얼굴인데 앞에 자주 앉았었나? 답례로 가볍게 목례를 하며 감사 인사를 건넨 성규의 생각은 거기까지였음 수강생이 한둘이어야 제대로 기억하고 말고를 하지




그게 성규의 착각이라면 착각이었을까

속으로만 생각한 그 말을 깨 버리려는 것처럼 그 뒤로도 꽤 자주 그 학생은 성규에게 뭘 바쳤음 


비 오는 날에는 교탁 위에 뜨끈한 꿀물이 있어 마시면서 강의를 하기도 하고, 미치겠다 싶은 더운 날에는 시원한 아이스 커피가 있고, 아 오늘은 정말 피곤하다 하는 날에는 박카스를 비롯한 자양강장제, 비타민제가 줄줄이 올려져 있고


그것들 옆에는 꼭 연보라색 포스트잇으로 작은 메모들이 남겨져 있으니, 모른 척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엇음


받는 물건과 함께 잠깐씩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길어지고, 언제 한번은 밥도 먹은 적이 있음 선생님 선생님 하며 잘 따르는 학생인데 굳이 내칠 필요도 이유도 없고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밥 정도는 사 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날이 갈수록 소소한 것부터 한눈에 봐도 값이 꽤 나가겠다 싶은 것들까지 줄줄이 받다 보니 이렇게 마냥 받아도 괜찮을까 싶은 성규임 괜찮다고 매번 말을 해도 거절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손에 꼭 쥐어주고 가니 난감하기만 한 건 성규임


 아니, 옆에 한국사 강의 하시는 선생님도 뭘 받긴 하시긴 하지만... 한 학생에게, 매번, 이건 한 번도 빠짐이 없으니! 이건 성규에게 고민-남들이 보면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아닌 고민이었음


매번 조공을 하는 그 학생은 남우현이라고 했음

이것저것 줄 때마다 자기에 대한 소개를 읊으니 모를 수가 없엇던 성규임 밥도 같이 먹었겠다 투 머치한 인포메이션을 가득 들었더랬지


우현이라고 하는 그 조공러는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초시생이고, 나이는 자기보다 두 살 어리다고-성규가 강사치곤 매우 젊은 축에 속하는 것으로 봐서 보통의 공시생 나이-했었나 또 서울에 올라와 혼자 자취를 한다고 했음 


굳이 자기에게 조공을 하지 않아도 일단 한번 눈에 담으면 자꾸 띄는 그 학생은 보통의 공시생보다 약간 달랐음 밤이 낮 같고, 낮이 밤 같은 공시생들 사이에서 늘 단정한 헤어스타일, 자주 바뀌지 않는 것 같은데 또 보면 새로운 트레이닝복, 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늘 생기를 띄는 얼굴 같은 것들이


근데 나 진짜 쟤 모르는 거 맞나? 뭔가 익숙한데 전혀 익숙하지 않은 얼굴인데 뭔가가 익숙하단 말이지




아무튼 내내 우현이라는 학생을 지우지 못하고 다니던 성규가 퇴근을 하려고 할 때임 지하주차장에서부터 차를 끌고 나오는데 골목 옆의 잘 빠진 세단 하나가 보임 노량진에 무슨 저런 차가... 하고 슬쩍 창문을 내려 심드렁하게 보는데 익숙한 뒷모습 하나가 보임 어, 우현 학생이네 근데 저건?


자연스럽게 책가방을 옆의 정장 차림의 남자에게 넘기고 그 옆의 다른 남자가 수십, 아니 수백 번은 더 열어 주었을 뒷좌석에 물 흐르듯 타는 우현 학생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성규가 멍 때리고 있자 뒤에서 빵빵거리는 클랙슨 소리가 성규를 재촉함 아직도 벙 찐 성규를 




어찌저찌 집까지 오긴 했는데 그 장면이 못내 눈 앞에 걸림 안 그래도 유별나게 행동하는 것에 자꾸 걸리던 학생이었으니까 뭘까 뭐였지 그게 그냥 넘길 장면은 아닌 것 같은데 보통의 수험생이 저런 차에 저런 사람들을 끼고 다닌다고? 아니 아닐걸 이상하게 이럴 때만 동하는 감이 성규를 쿡쿡 찌름


나 진짜 쟤 모르는 거 맞냐... 어디서 본 적 없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급하게 메신저를 켜서 친했던 동기들에게 연락을 보냄


[야]

[나 뭐 하나만 물어보자]

[우리 경영에서]

[남씨 같은 특이한 성 가진 후배가 있었나?]

[아니 같은 거 말고]

[남씨 성 가진 애]


잠시 뒤에 메시지가 왔다고 성규가 쥔 폰이 깜빡거림


[남씨 성??]

[갑자기 무ㅝㅓ야]

[아 근데 남씨면]

[얘 말하냐?]

['남우현' < 연락처 전송]



당황으로 얼룩진 성규의 얼굴은 간만에 봤는데 뭐 이런 걸로 연락하냐는 동기의 말은 보이지도 않음 성규의 머릿속에 너무 바빠 잊고 살았었던 추억의 조각들이 하나 둘 떠오름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지나감


-야, 이번 신입생에 존나 대박인 애 하나 있대.

-뭔데, 예쁘대?

-아니, 미친놈아. sw그룹 알지, 거기 후계자라는데?

-미친, 그런 애가 신입생으로 온다고?

-안 예쁘면 말아.

-뭐래, 이 병신은.

-이 새낀 무시해. 와, 걔는 얼굴 한번 보고 싶다.

-이름은 뭐랬지... 현? 무슨 현이랬는데.

-야, 나 그건 알아. 우현인가, 맞지?

-어어, 그거야. 아무튼 존나 쩔지 않냐?


우연히 캠퍼스를 걷다 한 무리에게서 들었던 가십거리를 이렇게 다시 마주할 줄이야 내내 성규를 따라다니던 부담이 어느새 크기를 키워 이렇게 나를 집어먹을 줄이야 성규는 고개만 한참을 푹 숙이고 있었음 아니 그렇게 높으신 분이... 왜, 나한테......


다음 날 어김없이 성규에게 찾아온 그 해사한 얼굴을 보며 성규는 울상인 얼굴로 애써 웃어보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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