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그런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아니, 근데 생각을 해 봐. 조금씩, 그것도 존나 조금씩 스미는데 그걸 바로 알아차리며 사는 게 피곤하지 않나? 폭우에 옷 젖는 줄 모르는 건 병신인 거고, 가랑비에는 그럴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이다. 그러니 사소한 일들은 좀 스루하며 살자가 인생의 모토. 왜냐고? 난 피곤한 건 딱 질색이니까.




그래서 그러는 거다. 내내-그것도 내리 삼 주를- 와 박히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커피나 홀짝대는 건, 난 피곤한 게 싫어서다. 이 카페는 다 좋은데, 알바생이 존나게 나를 째린단 말이지. 죽- 째진 눈으로 뚫어져라 보는 게 아주 처음엔 시비 거나 싶었는데, 좇는 얼굴엔 악의라곤 없는 것 같아서 그 생각은 접었다. 



아니, 생판 남인 사이에 뭘 그렇게 꼼꼼히 보는지. 내가 빤히 쳐다보면 저렇게, 피할 거면서. 단골을 알아보나? 저번에 돈을 덜 줬나? 시답잖은 생각도 했다. 매번 카운터와 거리를 두고 앉아도 저 알바생의 시선은 꼭 나를 따라왔다. 그렇게 생긴 눈으로 보면 그냥 봐도 째리는 것 같아 보인다는 걸 모르나 봐. 하긴, 그걸 아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그렇게 티 나게 보지도 않지. 내 성격이 아무리 개차반이래도 다짜고짜 면전에 뭘 꼴아, 하기엔 오래 살고 싶은 새가슴 소유의 운명론자다. 그래서 그냥 무시하는 중이다. 저 알바생의 시선을, 삼 주를.



뭐, 날 이렇게 피곤하게 만드는 알바생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길 찾은 이유는... 커피 없인 못 사는 미대생이고, 학교에 오는 것도 벅찬 헌내기의 과방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가 여기고, 문외한에 막입이지만 맛도 나쁘지 않고, 가난한 대학생의 주머니 사정에 걸맞게 저렴하고, 무엇보다도,


-이 씹새는 또 늦어.


약속 장소이기 때문에.




하여튼 이성열 이 새끼는 남 인생에 분탕질 치는 게 취미인 줄은 알았지만, 맥 끊기까지 잘하는 줄은 몰랐다. 내가 그걸 알았음 친구 안 했지.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던 세 시간 전엔, 간만에 느낌이 오길래 연습도 할 겸 드로잉을 했다. 진짜 오늘이 날인 건지 예상보다 빨리 끝나서 바로 채색 중이었는데, 정적을 깨는 벨소리에 정말 말 그대로 맥이 뚝 끊겼다. 급하게 할 말 있다며. 꼭 면대면으로 얼굴 보며 해야 한다며. 새끼야, 니가 이리로 오겠다며. 이미 출발했다며.... 이렇게 딜레이 오질 거였음 말을 하든가. 나 증말로 꽃 한 송이만 더 칠하고 오는 거였는데. 아가리 점멸 진짜 죽여 버릴까 봐. 아메리카노에 잠기지 않았던 마지막 한 조각의 얼음이 잘그락 소리를 내며 퐁당 빠졌다. 얼음이 녹는 시간 내내 날 바람 맞혔다 이거지, 성열아. 허, 하고 절로 터지는 한숨에 애꿎은 손톱을 물었다. 아직도 손가락 군데군데는 붉고 짙은 색의 물감이 말라붙어 있었다. 



아크릴은 캔버스에 닿을 때가 제일 예쁘다. 푹 찍어 올리면 빛이 부서지는 그 은근한 불투명함이 예쁘고, 말라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진해지는 그 선명한 색이. 그러면서도 수채화보다 빨리 마르고, 유화보다 부드러운 맛이 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렇게 내 손에 있을 때는 좀 미스란 거지. 



덕지덕지 붙은 물감들을 떼기도 귀찮아져서 팔을 쭉 뻗고 찌뿌둥한 고개만 그냥 푹 박고 있는데, 발자국 소리와 함께 위에서부터 길게 그림자가 졌다. 아, 이 새끼. 이제 오셨냐? 형님한테 간만에 서열 정리 들어가 볼까, 열아?




-야, 이성열. 니가 요즘 안 처맞았지? 앞만 보고 달리는 니 인생이 존나게 노 리밋인 건 알겠는데, 내 앞에서 TPO 안 챙기지, 이 씹새야. 넌 사람을 씨발, 이렇게 기다리게, 하....


꽃 한 송이를 더 칠하지 못하고 버린 시간이 아까워 수백 번은 갈았던 독기를 들었다. 날카롭게 잘 벼렸고, 오케이. 머리를 홱 치켜들고 카운터 날리려는데, 마지막 글자를 뱉어 문장을 채 완성하기도 전에 내 앞에서 멀뚱히 눈만 깜빡거리는 알바생과, 한 차례 정적.


-...예?


순간 벙하니 쪘다가, 상황 파악을 마치고 급히 웃음을 참는 게 뻔히 보이는 지진 난 입꼬리에, 그 목소리에, 두 차례 암전. 


-어, 어...?

-그게... 아니, 필요하실 것 같아서 이것 좀 드리려고요. 손에 그거, 아까 계산하실 때부터 보이길래.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저기요, 방금 그거는 제가....

-... 잠시만요, 지금 손님이 오셔서. 그럼, 일단 이건 여기 두고 갈게요.


할 말을 마치고 물티슈를 건네며 서둘러 카운터로 돌아가는 뒷모습이 왠지 불안했다. 다섯 걸음이나 걸었을까, 참지 못해 풉 하고 뒤에서 터지는 웃음소리에 확 쪽팔려졌다. 씨발, 생판 모르는 남한테 뭔 개잡소리를 들었나 싶겠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의 나는 얼굴마저 손에 묻은 물감처럼 시뻘겋게 변했을 게 뻔했다. 아... 엄마, 이제 앞으로 삼 년은 이불 털지 마요. 엄마 아들 오늘 개쪽팔린 일 best 3 갱신 들어가요.



큰 소란 후에 딸랑-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제서야 얼굴을 비치는 이성열을 향해, 냅다 물티슈부터 던진 건 씨씨티비에 안 찍혔으면 했다.



*

[스며들다]




정말로 더 웃긴 건, 그날 이후로 우리가 좀 친해졌다는거에 있다. 그것도 아주 급속도로. 쪽팔린 건 쪽팔린 거고, 웃긴 건 웃긴 거지. 아, 나 그렇게 모양 빠지는 사람은 아닌데.



'오늘은 화 안 내시네요. 욕 잘하시던데.'

'아, 그땐 죄송했어요. 제가 그쪽이 친구인 줄 알고....'

'그 키 크신 분이요? 무슨 상황인지 대충은 알겠더라고요.'

'예, 그 새끼가 그때.... 아, 아무튼 정말 실수였어요. 그러니까 그만 잊어 주세요.'

'일단 뭐, 봐서요. 음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드릴까요?'

'쪽팔리니까 상황 따지지 말구요.... 네, 그걸로 주세요.'



'어서오세요. 어, 오늘은 손이 깨끗하네요.'

'손에 뭐, 물감이요? 아, 오늘은 밤새 작업할 거라 이제 오는 거라서요.'

'궁금했는데 역시 미대생 맞으시구나. 어울려요.'

'그런 말은 또 처음 들어 봐요. 칭찬이죠?'

'그럼 앞에 대고 욕을 할까요, 누구처럼?'

'아, 쫌. 그거 그만 잊어 주라니까요....'

'알겠어요. 노력해 볼게요. 오늘은 특별히 더 진하게 타서 드릴게요.'



카페에 갈 때마다 알바생은 늘 나를 반겼다. 낯을 좀 가리는 나와 다르게 그는 말을 곧잘 붙여 왔는데, 그 모습이 신기했다. 날카롭게 생긴 거랑 영 딴판으로 서글서글한, 그런 요상한 느낌? 대화를 부드럽게 잘 이끌었고, 적당한 선에서 장난도 칠 줄 알고. 개그 코드 안 맞는 이성열과 붙어 지내다가 보니 신세계를 마주한, 그런 느낌 말이야.



그 카페 알바생, 그러니까 성규 형은 저 언덕 위의 법대생이었고, 나보다 두 살이 많으며, 미술에 꽤 관심이 많았다. 내가 졸전 준비한답시고 밤새 작업실에서 머리 싸매고 있으면, 꼭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찾아왔다. 안 그래도 바쁘고 피곤할 텐데 자꾸 안 와도 된대도, 자긴 이 물감 냄새가 좋다나 뭐라나. 마음에 안정을 준다나 뭐라나.... 아무래도 혼자 작업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가끔은 무섭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했는데, 성규 형이 자주 놀러 오는 덕에 요즘은 좀 덜했다. 매번 유니폼 입는 모습만 보다가 사복 입은 걸 보면 또 느낌이 색달라서 나쁘지도 않고. 저 형은 막 존나 잘생긴 건 아닌데, 잘생긴 것 같아. 대놓고 말하면 처맞겠지.




'성규 형.'

'어, 왜?'

'근데 형 가방에 그 종이들은 뭐야? 맨날 들고 다니는 거.'

'아, 그거? 별거 아니고, 그냥 최신 판례들.'



한번은 내 그림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는 등에 대고, 형이 늘 들고 다니는 종이 뭉치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아마... 금방 후회했었지.



'뭐야, 이게.... 이게 보인다고? 눈에 들어와, 이게?'

'그럼 왜 안 들어와.'

'아니, 무슨 글씨가 저렇게 좁쌀이야. 한자는 또 왜 저리 많아. 저걸 어떻게 읽는데?'

'어떻게 읽긴. 읽어 줘? 구 사회안전법상 보안감호처분은 처분을 행하는 주체, 처분 형식, 처분에 대한 불복절차 등이 상이하여 기능이 준별되고....'

'형, 그만. 나 머리 아플라 그래.'

'또 무슨... 엄살은.'

'아, 진짜로!'



맨날 색색깔의 물감과 깨끗한 캔버스만 보고 살다가 빽빽한 활자를 읽으니까 토할 것 같았다. 거짓말 아니고, 진짜로! 저런 걸 읽는 새끼는 사람 아니고 괴물이라고 생각하는데, 하여간 저 인간도 보통은 아닌 게 확실했다. 





좆대로 사는 생활 패턴 때문인지 내 그림은 늘 낮보다 밤에 더 잘 그려졌다. 삘도 막 빡 오고, 채색도 깔끔하게 되고. 오늘도 어김없이 해는 떨어졌고, 땅거미도 집에 돌아갔고. 작업실에 혼자 남아 연습하는 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현아, 형 왔다.

-어, 형. 또 왔냐.

-뭐냐, 그 반응. 도로 꺼지라는 걸까.

-어디든 편하게 지내시면 되겠습니다, 형아.


어느새 다가와서는 큭큭대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메리카노를 건네는 손이 오늘따라 유독 하얬다. 이젠 장난으로 인사도 대신할 줄 알고, 많이 친해지긴 했네. 날씨 탓에 벌써 물방울이 맺혀 촉촉해진 홀더를 두어 번 쓸고, 쪽 빨아먹었다.


-오, 형. 오늘 커피 진짜 맛있다.

-내일치 원두 상태가 괜찮길래. 몰래 쌔볐다, 형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잘한다.

-그리라는 그림은 안 그리고. 잘하자, 우현아.

-아, 옙. 여부가 있겠습니까.


내가 캔버스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성규 형은 주로 소파에 누워 잠을 자거나, 폰 게임을 하거나, 알이 큰 안경을 쓰고 헌법을 뒤지기에 바빴다. 넓은 공간에 적막이 드리우면 형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 내가 물통에 붓을 담가 찰랑거리는 소리 같은 게 잔잔하게 채워졌었다. 근데, 이 형이 오늘따라 자꾸 뒤에서 알짱거리네. 알짱거린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현아, 거기 파란색으로 칠하는 거야?

-엉, 왜.

-그냥.

-뭐야....

-그럼 저긴 어떻게 해. 물 많이 묻혀서?

-엉, 그럴 거야.

-근데 저기 아래, 좀 튀어나온 것 같지 않냐?

-아, 존나 형. 쫌!

-뭐, 왜.

-오늘 뭐야. 왜 시어머니 모드야. 나랑 고부 갈등을 만들고 싶지, 형.

-아니, 그냥. 너 하는 거 보니까....

-나 하는 거 보니까, 뭐. 왜, 형도 해 보고 싶냐?

-어, 해 볼까?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대꾸하길래 한숨을 푹 쉬었다. 저 형... 좀 자주 느끼는 거지만 가끔은 진짜 나잇값 못하는 것 같애. 앞치마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비켜 주자, 괜히 우물쭈물 하는 모습이 웃겼다. 여기 앉아? 그럼 서서 하게? 아니, 갑자기 떨리잖아. 영 애매한 포즈로 붓을 들고 색칠하는 게, 구도는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모델이나 해 보라고 할까. 성규 형은 비율이 괜찮으니까 화폭에 담고 싶은 게 내 마음이라고 꼬셔 봐야지.


-야, 우현아. 이거... 이렇게 하는 게 맞냐?

-어, 맞아. 아니, 형 왜 이렇게 어설퍼?

-보는 거랑 하는 거랑 다르잖아.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러셨어요?

-아, 됐고. 이거 뭐, 여기서 더 진하게?


맨날 단정한 모습을 보이는 성규 형이 쩔쩔매는 꼴을 보니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와, 진짜 부조화다. 푸하하, 터지는 웃음을 그대로 날려 보내고, 형을 일으켜세웠다. 일어나라니까 또 가만히 일어나는 게, 저 형 의외로 귀엽네. 


-형, 잘 봐. 남화백이 괜히 남화백이 아니야.

-지랄은.... 해 봐.


의자에 앉은 내 뒤로 어색하게 붓을 들고 서 있는 성규 형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쳤다. 잠깐 움찔 하는 것 같았지만, 뭐 어때. 손을 내리니 알아서 잘 딸려온다. 다른 사람이 붓을 쥔 손을 잡는 느낌은 영 어색했지만, 내 실력이 못 나올 만큼은 아니었다. 도화지를 마주하고 하나하나 설명하며, 감싼 형의 손에 힘을 주고 집중했다.




-성규 형, 이건 수채화라서 물에 잘 녹는 거야. 아크릴은 수지로 만들어서 잘 안 녹는데, 수채화는 금방 섞이거든. 붓이 움직이는 대로 도화지에 금방 물드니까 물 조절을 잘해야 돼. 안 그럼 종이만 울고, 투명한 색이 안 나와.

-....

-형, 듣고 있어?


평소 같았음 쿠사리 하나라도 날아와야 하는데 영 잠잠한 등 뒤가 이상해서 고개를 돌렸다. 어라. 아주 예전, 처음 만났던 그때의 형처럼, 알 수 없는 미묘한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보는 형이 있다. 한참을 말 없이 마주친 시선에 순식간에 많은 장면들이 지나갔다. 이런 걸 오버랩이라고 했었나. 잠깐 다른 생각에 빠진 찰나, 갑자기 형이 가까워지더니,


입술이 닿았다.



스르륵 소리를 내는 것처럼 예쁘게 감기는 형의 눈을 보면서, 나는 눈도 못 감고... 그저 멍하니 있었다.



끝이 보이는 여름날의 밤은 적당히 선선했고, 어둑한 하늘에는 동그란 달이 창문 사이로 빛을 내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이 갠 하늘은 참 맑았고, 풀벌레 소리가 안개처럼 깔렸다. 그래서였나 보다. 내 심장 뛰는 소리가 형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쿵쿵 울리는 건, 그래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거듭되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커진다. 그래서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하나 봐. 아마... 형을 향한 내 마음이 그랬던 것 같다. 마침 형은 내 마음에 조용히 내려, 나를 적시고 있었으니까. 그만 흠뻑 젖어 버린 것도 모를 정도로, 내게 너울대고 있었으니까.


 

형이 쥔, 내가 쥔 붓이 닿은 도화지엔 파란 물감이,

진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2017, 8. 작업실에서, 규형이랑.
-2017, 8. 작업실에서, 규형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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