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으, 잠깐만, 좀, 흐....

-후, 윽... 씹....

-아... 읏! 하, 응, 흐읍....



초가을이란 놈이 어느새 얼굴을 디밀은 밖은 꽤 쌀쌀했다. 추위를 잘 타지 않는 나도 외투 없이 나가면 소름이 돋았으니까. 험하다고 소문난 동네,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한 다 쓰러져가는 좁고, 낡은 집. 그런 집에서도 방 안엔 훈기가 가득했는데, 그거야 방금 떡쳐서 그렇지, 라고 생각하며 남우현에게서 내 것을 빼냈다. 질척이는 얇은 콘돔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끈적한 것이 잔뜩 딸려 나온다. 오늘 몇 번 했더라. 유독 남우현이 더 달라붙긴 했는데.... 아, 내가 매번 저 새끼랑 뒹군다지만 그래도 이건... 진짜 적응 안 돼.



콘돔을 대충 묶어 버리고 남우현이랑 꼭 닮은 모양새로 방바닥을 뒹굴거리던 라이터를 집어들었다. 미끌거리는 손가락 때문에 헛도는 부싯돌도, 두세 번의 헛손질도 익숙하다. 자연스러운 수순인 것처럼 담배를 무니, 역시 당연하다는 듯 뒤에선 기침이 터진다. 남우현의 신음 소리가 가득했던 방에 이젠 기침이 얹어진다. 콜록, 콜록, 콜록....



-... 입 좀 다물 수 없어?

-뭐. 창문이라도 열고 지껄여.

-듣기 싫으니까 좀 참아 봐.

-이, 썅.... 그냥 나오는 걸 어떻게 막아, 병신아. 지금 니 몸 멀쩡하다고 자랑해?



남우현, 저 반 병신인 새끼는 태어날 때부터 폐가 약했단다. 천식이랬나? 탁하고 습한 공기를 마시면 몸에서부터 바로 반응이 온다고. 근데 그게 담배 연기엔 유독 심했다. 그리고 나는,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한참을 엎어져 투덜대던 남우현이 몸을 일으키더니, 창으로 가 문을 연다. 헐벗은 남우현의 몸이 얇은 이불에 질질 끌리며 감싸진 꼴이 웃겼다. 대충 여며 이불 사이로 훤히 드러난 다리가 달빛을 받아 도드라졌다. 점차 자욱해지던 공간에 찬 바람이 분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는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코가 매울 정도로 차고, 시린 바람이 분다.



-아깝다.



나는 진심으로 아까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남우현이 빨리 가 버릴 이유 하나가 사라졌으니까. 내가 담배 연기 앞에선 병신처럼 콜록거리기만 하는 남우현인 것을 잘 아는 것처럼, 남우현은 내가 섹스 후 담배를 피우는 이유를 잘 안다. 그리고 철저히 무시한다. 아예 모르는 것처럼 매번 등을 돌린다. 방금도 들렸을 게 뻔한데, 무슨 개소리냐며 묻지도 않는다. 끝에서 남우현은 늘 고개를 돌린다. 티 다 나는데, 병신 새끼가. 



남우현은 원래가 그렇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지 좆대로 행동해야 성이 풀리는 새끼. 내가 싫어할 수밖에 없는 새끼. 방금 전의 섹스가 꽤 마음에 들었던 건지, 차가운 바람 아래서 이불에 돌돌 파묻힌 남우현이 휘파람을 분다. 이내 가벼운 허밍이 이어진다. 아, 정말... 귀를 도려내고 싶은 밤이다.





달이 가장 가까이 닿는 곳


김성규x남우현

w. log




애비는 종이었다, 하고 시작하는 시가 있다. 은지? 아니, 은빈이었나? 아무튼 고등학교 때 짝사랑... 뭐 그런 비슷한 걸 했던 여자애가 노트에 옮겨 적던 걸 우연히 본 적이 있다. 가녀린 여자애의 손과 어울리지 않는 그 멋 없고 솔직한, 그래서 더 투박해 보이던 구절. 시간이 흘러 지금은 여자애의 얼굴마저 흐릿하지만 그 구절 하나만큼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 깊게 박혀 있었다. 이따금씩 불쑥, 하고 내 앞에 튀어나온 문장을 되새길 때면 입 안 가득 모래를 씹은 기분이었다. 혀 끝에 비릿한 씁쓸함이 감돌았다.


애비는, 종이었다.



그는 내게 세 가지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술과 여자, 노름을 좋아하던 사내. 토끼 같은 아내와 여우 같은 두 자식새끼를 버리고 하염없이 반짝이는 거리의 밤을 쫓던 사내. 미련할 정도로 순종적인 아내가 죽었을 때에도, 식장에 얼굴 한번 비친 적 없던 매정한 사내. 결과가 뻔한 게임에 손목을 걸어 잃고서도, 다른 하나가 남아 있기 때문에 판을 떠나지 않았다던... 그런 사내.



그래서였을까. 언젠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창백한 얼굴로 긴 혀를 내밀어 마주한 사내의 얼굴을 보면서도 나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리는 사내 앞에서 나는 그저 며칠 전 깨진 소주병에 맞아 피딱지가 선연했던 눈가를 찬찬히 쓸며 아... 이젠 명수랑 나만 남았구나, 하는 생각만을 곱씹었을 뿐. 사내는 그 하찮고 볼품없는 인생의 끝에서도 나에게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남겨진 것들, 남겨진 것 둘.



사내를 기억하는 일은 일평생 내내 없으리라 다짐했건만,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사내가 죽은 후 그를 찾아간 적이 한 번 있었기 때문에. 새까만 양복을 차려 입은 남자들이 김성규 씨? 하고 나를 불렀던 날.



왜 내가 한 번도 구경조차, 아니 상상조차 하지 않은 천문학적인 숫자가 적힌 종이가 내 앞에 내밀어졌는지, 왜 아주 어릴 적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내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도장이 그 옆에 찍혀 있는지, 왜 당신은 세상을 버리고 가서, 왜 감당할 수 없는 곳까지 손을 뻗어서, 왜 평생을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아서, 왜,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나는 당신의 아들로 태어났는지.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치미는 서러움을, 미처 닿을 리가 없는 원망을 쏟아내며... 어머니를 보내드렸던 그날처럼 서럽게 울었던 적이 있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을 것이다.



-이 바닥에서 가방끈 안 중요해, 끈질김이 필요하지. 대학교 다니다가 그만뒀다고? 허어... 젊은 청년이 왜 그랬대. 아무튼, 급하면 매일 나와서 확인해요. 우리도 하나하나 다 챙길 수가 없어. 일자리 있으면 오는 사람대로 줘야 하니까. 뭐... 열심히 해 봐, 학생.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비슷한 말씀을 해 주셨을까. 스치듯 지나간 걱정 서린 얼굴에도 나는 배가 고팠다. 애정이, 손길이 고팠다. 외로웠다. 그리고 이내 지워 버렸다. 사치, 지금의 내게 어울리는 단어였다.



그 후로 나는 정말 개처럼 일하며 살았다. 닥치는 대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고 살았다. 얼어 버릴 것처럼 차가운 세상에서도 나는 살아야 했다. 나는, 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말고 살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다. 



명수는 절대 나처럼 살면 안 되니까.




사랑스럽고 불쌍한 내 동생, 우리 명수는 이렇게 살면 안 되니까. 지옥에 사는 주제에 우리 둘은 늘 천국을 꿈꿨다. 그 아이가 꾸는 꿈을 이뤄줄 수는 없어도 적어도 지켜야만 했다. 얼어 가는 차가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 둘이 전부였으니까. 명수는 내게 유일하니까.




***




-있잖아, 고객님? 왜 이것밖에 안 돼.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지.

-아니, 갑자기 십 만원이나 더 받는다고 하시면.... 저도 당장은 구할 수가 없어요. 이것도 힘들게 마련한 거 아시잖아요.

-씨발, 아가리 안 닥치지. 좋게 말하니까, 이게. 야, 니 애비가 쓴 돈을 봐. 이렇게 쥐좆만한 돈으로는 원금은커녕 이자도 고작이야, 알어? 하도 비니까 큰형님이 니 사정도 봐주셨는데, 이제 배가 불렀지? 그지, 장난처럼 보이지?

-하지만, 정말 저도 이게 최선,



해가 얼굴을 감추고 나면 늦지 않은 시간임에도 곧잘 어두워지던 어느 날이었다. 집으로 가는 문턱을 코앞에 두고 먼지가 날리게 맞고 있을 때였다. 좁은 골목길의 끝에서 구둣발에 잘못 맞은 턱이 얼얼했다. 몇 년 전의 흉터로 남았던 눈가가 또 찢어져 시야는 온통 빨갰고, 호흡은커녕 헉 하는 신음조차 겨우 삼키고 있을 때였다.



-야, 여기가 마지막이라매. 언제 올래. 내가 배고프다고 아까, 아... 이 씹새끼가. 담배 안 꺼?





전단지를 수없이 붙였다 뗀 자국이 가득한 벽돌담, 썩은 냄새를 풍기는 쓰레기 봉지와 굴러다니는 깨진 병조각들, 그 아래 신음을 삼키며 피떡이 된 나와,


나처럼 뭘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와 박히는 비싼 모든 것을 걸치고, 날카로운 눈매의 끝에 물기를 달고 기침을 하던 남우현.




그것이 남우현과의 첫 만남이었다.



남우현이 신경질을 내자 나를 패던 놈들은 급히 자리를 정리하기 바빴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발길질이 거둬졌다. 뒹굴다 유리라도 박혔는지 따끔히 찔러오는 등에, 나는 누워 그저 신음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 쓰러져가는 동네의 한가운데서 혼자만 빛을 내는 검은 세단이 떠나기 전, 나를 훑던 남우현의 시선을 마지막으로 정말, 끝이었다. 아까의 소란이 다 언제였냐는 듯, 금세 조용해진 골목 구석에서 나는 입에 가득 찬 핏덩이를 뱉으며 하늘을 봤다.




눈물인지 핏물인지 모를 것이 볼을 타고 흘렀다. 나는 이 골목 구석의 쓰레기만도 못하게 비참한데. 나의 시간은 아주 예전에 멈춰 버린 것만 같은데.


하늘은 여전히, 좆같이 맑아....




***




그 이후로 양복 입은 남자들이 나를 찾아오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고민을 했던 것도 같다. 아니... 나는 안심을 했었나. 이틀에 한 번 꼴로 엎어지던 집안이 이 주에 한 번이 고작인 꼴이 됐으니까. 대신 남자들의 빈자리를 남우현이 메꿨다. 활짝 열린 대문을 보고 허겁지겁 들어가 마주한 꼴은,



-이제 와? 오래 기다렸잖아, 빡치게.

-너... 뭐야.

-니네 집 존나 좁다. 볼 것도 없고, 오기만 좆도 힘들고.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사나 싶어, 그지?

-너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성규라고 했나, 김성규?

-.......

-내가, 니 이자 까 줄게.

-... 씨발, 개소리 마. 처맞는 꼴 좀 봤다고 너도 내가 만만해 보여?

-못 믿는 눈치네. 진짜라니까?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씻고 나와. 성규야, 진짜!



그 이후로 어떻게 됐더라. 드문드문 끊긴 기억이라 중간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냥, 남우현이랑 그 길로 떡쳤다.



-흐, 으으... 야, 너, 후으, 처음, 이야?

-하아... 아, 윽.... 

-얼굴값 존나, 못해, 씹.... 아으, 야! 좀, 씨발....



노란 장판 위에 고작 깐 이불 위에서 서툴게 엉키는 몸 둘과, 벽을 타고 올라간 곰팡이가 눈을 내어 지켜보던. 섹스하는 내내 욕을 먹고, 적당한 무게가 내 위에서 풀썩 엎어지고, 뼈마디가 부딪히는 곳이 아팠던. 좀 거칠고 가파르던 숨을 내뱉고, 닿는 모든 것이 뜨겁고, 안은 좁고 또, 습했고...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부드러웠던.


그게 내가 기억하는 그날과 남우현이다.




남우현과의 섹스의 의미를 정확히 알게 된 건 좀 더 후의 일이었다. 일주일치 이자의 값, 큰형님의 막내아들이 눈을 빛내신 새 장난감. 그게 내 가치였고, 그곳에서 다뤄지던 나의 위치였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누가 그랬던가. 남우현과의 섹스는 금방 익숙해졌고, 그 빈도는 잦아졌다. 몇 년을 내내 한결같이 매일 움직였던 내가 일을 구하러 나가는 날이 줄었다. 대신 명수에게 보내줄 수 있는 돈의 액수가 늘었고, 수도세와 식비 걱정이 덜어졌다. 전보다 몸을 쓰는 일이 줄었으니, 짓누르는 고통에 신음하며 잠드는 날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명목이야 충분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다만... 무서웠다. 그 안락한 익숙함이 너무 무서웠다. 나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그저 방 안에 틀어박혀 영락없이 남우현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꼴이었다. 곱씹고 나니 좆같은 기분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건 몸 털린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무엇보다도 좆같은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체념만이, 늘 내가 가진 전부다. 







늘 그래왔듯 오늘도 남우현과 몸을 섞었다. 평소와 다른 게 하나 있다면... 남우현이 오늘은 유달리 더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것. 재수 없는 건 둘째라고 치고서도 마음에 안 들었다. 내 불행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게 남우현 같아서. 비단 남우현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야, 김성규.

-.......

-성규야, 난 대답 안 하는 거 싫어해. 알잖아.

-그래, 왜.

-솔직히 좆같아 미치겠지.

-뭐가.


니가? 하는 말이 목 끝에 걸렸어도 나는 삼켜냈다. 남우현의 존재는 하늘이 내게 내린 처음이자 마지막일 동아줄이었으니까. 속 깊은 곳부터 버석하게 썩어 빠져서는, 금칠을 한 동아줄. 안락함을 아예 몰랐었을 때라면 모를까, 이제 와 놓을 수는 없었다. 나라고 험한 길로만 걸을 필요는 없는 거잖아.



-아니, 대충 봐도 그렇잖아. 그 돈, 니가 쓴 거 아니라매? 난 또 첨엔 니가 미쳐 돌았는 줄 알았지. 그렇지 않고서야 얻다 손을 대. 아빠의 마이너스 유산, 뭐 그런 거야?



그러니 나는 남우현이 아무리 좆같아도 참아야 했다. 좆같은 건 남우현이 아니라도 내 인생에 발에 채이고 굴리도록 널렸으니까. 내가 빡치길 바라는 모양새로 비꼬며 낄낄대는 꼴을 보고서도, 참아야 했다.



-우리 성규, 그거 때문에 나랑 떡도 치고. 듣고 보니 니 동생 생활비도 니가 대 준다고 했었나? 성규야, 너 동생 이름이 뭐랬지? 



그러니까, 씨발. 참았어야 했는데.

손에 잡히는 것을 던졌다. 아무거나 상관없었다. 어떤 물건이 어디에 부딪혀 부서졌는지 뭔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아니었다. 쾅! 하고 큰 소리가 났다. 그러나 우리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남우현과 나 사이에서 명수란 금기시되는 화두였다. 남우현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랬다. 암묵적으로 그렇게 합의한 거였다. 근데 지금 누구 이야기를. 그 입으로 감히, 누구 이름을 꺼내는 거야. 꾹 다문 입 때문에 관자놀이에 핏줄이 선다. 남우현의 눈이 빛난다.





'형, 나쁜 게 뭘까. 좋고 싫은 건 있어도 착하고 나쁜 건 모르겠어. 근데 오늘 우리는... 나쁜 꿈 속에 버려져 있는 것 같아. 세상에 형하고 나, 둘 뿐인 것 같아. 가위로 우리 둘만 오려내져서 여기에 남겨진 것 같아. 이런 게 나쁜 거야? 성규 형, 우린 이제 어떻게 돼?'



내 동생, 우리 명수.

내가 이 세상에서 지켜야 하는 유일한 것.



마음에 든다는 웃음이 남우현의 얼굴에 퍼진다. 걸려들었다. 뻔히 보이는 남우현의 얕은 수에 나는 걸려들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았겠지만... 이게 내 약점이라고, 어서 보라고 갖다 바친 꼴이었다. 손아귀에 쥐기도 전에 원하는 모든 것을 족족 잃어버리는 나였으니, 명수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꼴을 남우현이 모른다면 병신인 거였다. 남우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다.





-성규야.

-.......

-니가 이래서 내가 재미있어.

-.......

-가진 건 쥐뿔도 없는 새끼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든다니까. 너 지금 나 찢어 죽일 것처럼 보는 건 알어? 물론 그렇게는 못하지. 니 주제가 있고, 내 주제가 있는데.



혼자 키득거리던 남우현은 그 후로 어떻게 했더라.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날 보더니, 지갑에서 오만 원을 꺼내 몇 장 뿌렸다. 기분이라면서. 노란 빛을 팔락이며 나비처럼 떨어지는 지폐들. 다른 건 몰라도 남우현은 내 기분을 좆같이 만드는 거 하난 참 잘했다. 돈이라면 이젠 지긋지긋했다. 그 꼴을 눈에 담는 것도,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기계적인 숨만 겨우 내쉬고, 들이쉬었다.



그래, 사실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세상의 무게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에. 자각하고 나니 맥이 탁 풀린다. 지금 이 순간보다 내 인생에서 엉망진창인 순간이 있을까. 흠씬 두들겨 맞고, 뼈마디 겨우 추리며 골목길에서 뒹굴던 시절이 나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후회라는 것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내 손을 꼭 잡고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야윈 손은 안쓰러울 정도로 앙상했다. 미안하다고, 엄마가 미안하다고. 무엇이 미안하냐 물어도 그저 미안하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어린 날의 나에게, 아주 선명한 기억.



엄마, 엄마는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어요? 아셨다면 차라리 저도 데리고 가시지. 외롭고 긴 길이었을 텐데, 우리 같이 가지. 그러면 제가 엄마를 원망할까 봐 두려우셨어요? 그게 아닌데.... 미안해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돼요. 엄마의 잘못이 아니에요. 이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걸요. 그냥 우린, 나쁜 꿈 속에 버려져 있는 게 전부예요. 근데 엄마... 저 이제 그만 깨고 싶은 것 같아요. 이게 꿈이라면 깨고 싶어요. 더는 꾸고 싶지 않아요. 일어나고 싶어요. 엄마, 듣고 계세요?


제발,

대답해 줘요.


 



내 앞으로는 셀 수 없는 공이 붙은 금액이 빛이 아닌 빚으로 남아 있고, 불쌍한 내 동생을 위해 나는 일을 해야 한다. 남우현은 언제든 심심할 때면 찾아와 나와 몸을 섞을 테고, 재미 좀 더 보기 위해 날카로운 말을 던지기를 서슴지 않을 것이다. 비틀린 애정도 애정이라, 나는 차마 남우현을 내치진 못할 것이다. 애초에 나는 남우현을 내칠 수 없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아주 오래된 전래 동화 속, 호랑이에게 쫓기던 오누이가 절박한 마음으로 동아줄을 그러잡았듯이. 나 역시도 다 죽어가면서까지 남우현의 끝자락을 붙잡았을 것이다.







험하다고 소문난 동네,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한 다 쓰러져가는 좁은 집. 창문으로 달빛이 내리는 낡은 집. 그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내가 있다. 한쪽 벽을 타고 자란 곰팡이는 눈을 들어 여전히 나를 내려다본다. 미처 닫히지 못한, 열린 문 틈 사이로 남우현이 휘파람 부는 소리가 들린다. 이내 가벼운 허밍이 이어지고.... 또다시 귀를 도려내고 싶은 밤이다.



이 밤이,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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